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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양이 동양을 앞서나가게 된 비밀은? - 니얼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by 마리우온 2020.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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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500년 동안 서양의 문명은 동양을 포함한 전 세계를 지배해왔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 공용어로 배우는 언어부터 문화 전반에 익숙하게 퍼져있는 것은 모두 서양의 문명입니다. ’금융의 지배‘등 빅히스토리 도서들로 유명한 니얼퍼거슨 교수는 여섯가지 측면에서 서양이 동양을 앞서갈 수 있었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평] 서양이 동양을 앞서나가게 된 비밀은?  - 니얼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1. 자유무역과 경쟁을 장려하는 제도

서양이 동양보다 앞설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은 자유무역과 경쟁을 장려하는 제도를 꼽았습니다. 중국처럼 일권화된 지배체제를 성립하지 못 한 서양은 자유로운 무역과 경쟁을 장려하기에 적당한 환경이었습니다.

자유무역과 경쟁은 상업적 측면에서 생산량의 급격한 확대를 가져왔습니다. 산출물이 부족했던 초기 자본주의시대에 공급은 곧 바로 수요로 이어졌습니다. 자유무역은 생산을 해서 물건을 팔 수 있는 지역의 확대를 의미했고, 또 경쟁상대의 증가도 의미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량생산체제가 구축되고 생산의 효율이 증가하는 효율성 확대가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중국을 포함한 동양은 중앙집권을 유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경쟁이 장려되기도 했지만, 현재의 정치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경쟁의 목표였지요. 더 나은 물건을 만들어 해외에 판매하는 경쟁과는 다른 종류의 경쟁이었지요. 

2. 과학발전과 이를 뒷받침할 정치적인 후원

과학의 발전은 서양문명의 동양 지배를 급속화 시킨 대표적인 분야입니다. 우수한 과학기술은 곧 바로 뛰어난 무기의 생산으로 이어졌으니까요. 제도적인 측면에서 중국과 이슬람권은 종교적, 정치적인 반발로 과학제도의 발전을 저해하거나 우선순위에서 뒤에 두었습니다. 인쇄술의 발전으로 글을 쓰지않고도 대량의 인쇄물 생산이 가능한 시대에도 이슬람문명은 필사를 종교적으로 숭배하여 인쇄물 생산을 방해했지요.

이는 앞서 말했던 중앙집권체제로 자유무역과 경쟁제도를 장려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판단됩니다. 통치체제의 유지에 기존의 가르침 이외의 것이 중요시되는 과학교육 등은 지배층 입장에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반면, 서양은 무언가 좋은 것이 생겨나더라도 중앙적 차원에서 제지를 가할 힘이 부족했습니다. 통일된 왕국의 형태가 아니었으니까요.

3.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법치제도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법치제도는 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쌓은 부가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 한다면, 부를 축적할 유인이 없어질 테니까요. 이런 법적인 제도의 완비와 미비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사례입니다. 북아메리카는 헌법이 엄격하게 지켜진 반면, 남아메리카는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법을 바꾸는 수준이었으니까요. 

4. 의학

의학기술 역시 서양의 지배를 가능케 해준 힘이었습니다. 서양에서 발전한 공중 보건의 개념은 유아 사망률의 하락, 기대수명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발달한 의학은 잘 모르는 환경에서도 사람의 인체가 적응할 수 있는 적응력 역시 증가시켜왔습니다. 인류가 종말한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 질병에 의한 멸종이라고 하죠. 의학의 발전 역시 서양의 동양 지배를 가능케 해준 배경으로 꼽혔습니다. 

5. 소비사회

소비사회 역시 서양의 지배를 가능케 한 요인이었습니다. 소비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의류소비입니다. 의류는 한 개인의 개성을 나타낸다는 점과 또, 단가의 하락을 위해 대량생산을 시작하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ㅏㅏ사람의 흥미를 끄는 가장 큰 일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나 자신과 관련된 일’입니다. 소비사회로의 이행은 서양의 지배가 가능하게 된 요인이었습니다. 알려진대로, 소비사회는 공산주의 역시 무너뜨렸습니다. 

6. 직업윤리와 언어윤리 그리고 종교

종교 역시 중요한 역할을 끼쳤습니다. 그 중에서 근면, 성실 그리고 저축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은 초기 자본주의의 자본 축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직업윤리 위에 자본이 축적되면서 대량 생산이 나타나면서 이제는 과잉 공급의 시대가 되기까지 했으니까요.

종교는 중요하다. 이미 앞에서 유교의 '안정화 윤리' 때문에 서유럽에서 혁신을 몰고 온 경쟁적인 제도상의 뼈대가 중국에서 발달 하지 못했다고 한 바 있다. 설사 중국이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이은 『유교와 도교』(1915)에서 묘사된 것처럼 정체되고 늘 똑같은 사회와 거리가 멀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앞에서 이슬람 지도자 이맘과 물라의 권력이 어떻게 이슬람 세계에서 과학 혁명의 불씨를 꺼뜨렸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남아메리카의 경제 발전을 저해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도 알아보았다. 하지만 서양 문명 역사에 종교가 가져다준 가장 큰 공헌은 아마도 신교가 서양 사람들을 일하고 저축하고 글을 읽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닐까? 산업혁명은 분명 기술적 혁신과 소비의 산물이었다. 또 노동의 강도, 시간의 증가와 함께 저축과 투자를 통한 자본 축적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적 자본의 축적에 의존했다. 신교가 장려했던 교육은 이 모두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다시 생각 해보니 신교의 직업윤리뿐 아니라 '언어'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문은 이것이다. 오늘날 서양 혹은 적어도 그중 상당 부분은 종교와 함께 윤리마저 잃어버렸는가?

- 본문 중 -

시빌라이제이션을 읽고

두꺼운 책의 두께에 비해 정말 재미있게 읽은 도서였습니다. 서양은 어떻게 해서 동양보다 앞서나갈 수 있었을까요? 앞으로도 서양의 지배는 이어질까요? 이 책을 관통하는 대 주제입니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 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도적 차이가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관련된 도서들을 더 읽어보고 싶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 개화론’을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독서 행복한 하루 되세요 ~ 


시빌라이제이션 기억에 남는 문구들

1. 역사에 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과거는 하나다. 그리고 비록 과거는 지난 일이지만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경험과 내일,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첫째, 현재 세계 인구는 지금껏 지구에 살다간 인구 전체의 약 7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의 수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수를 약14대 1로 압도하는데도 우리는 감히 그들이 남긴 엄청난 양의 축적된 경험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과거는 우리 앞에 놓인 찰나의 현재와 수많은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연구가 아니다. 시간 그 자체의 연구다.
2. 물론 경쟁은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변화를 향한 욕구나 혁신을 장려하는 전쟁이 아니었다. 중국 문명의 핵심이었던 문자는 보수적 엘리트 집단을 생산하고 일반 대중이 그런 계층에 진입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포르투갈어, 영어뿐 아니라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같은 유럽의 언어들은 엘리트 집단의 문학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단계별 교육만 으로 많은 사람이 비교적 간단하고 쉽게 배워 쓸 수 있었으니 그 차이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범인(凡人)은 비범한 것을 보고 의문을 품지만 현자는 평범한 일에서 의문을 찾는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명나라 통치 방식에는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 너무 많았고 새로운 것은 너무 적었다.
3. 서양인과 최초로 충돌한 것은 1904년 만주를 두고 벌인 러일전쟁이었다. 일본이 바다와 육지에서 거둔 압도적인 승리는 곧 세계에 확실한 메시지를 보냈다. 서양 패권은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제대로 된 제도와 기술만 있으면(제대로 된 옷은 말할 것도) 아시아제국도 유럽제국을 무찌를 수 있다는 것이다. 1910년에 경제예측가가 있었다면 그 세기가 끝나기 전에 일본이 영국을 따라 잡을 것이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정말 그랬다. 1980년 일본의 1인당 GDP는 사상 최초로 영국을 넘어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10년에서 1980년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4. 프라하의 봄이 짓밟히면서 동유럽의 공산주의는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베를린이 동과 서로 나뉜 것 역시 불변의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반대파를 억누르는 데는 능한 반면 서구의 소비 사회에 저항하는 능력은 약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동독인들이 서독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되면서 서구 패션의 영향은 막아낼 길이 없었다 (서독의 라디오 방송은 진작부터 들을 수 있었다), 앤 카트린 헨델 (Ann Katrin Hendel) 같은 디자이너들은 곧 자신만의 서구 스타일 옷을 만들어 차에 싣고 다니며 팔기 시작했다. 그녀는 청바지도 만들어 팔았다.

"우리는 방수천, 침대 시트 등 데님이 아닌 것으로 청바지를 만들 려고 했다. 옷감에 물을 들이려 했지만 염료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 우리가 만든 옷은 인기가 매우 좋아 내놓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5. 이슬람의 복종이라는 문명은 여전히 코란 위에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책은 무엇인가? 자유로운 개인의 거의 무한하고 강력한 힘을 신봉하는 우리의 신념은 어디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가? 그리고 형식적 지식과 기계적 학습을 기피하는 우리의 교육 이론가들의 성향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러한 것을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잘 가르치고 있는가? 어쩌면 진정한 위험은 중국의 부상도, 이슬람도,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아니라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우리 문명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일 수도 있다. 
6. 그래도 1500년 이후 세계 문명에서 서양의 지배력을 과소평가한 역사책이 있다면 중요한 요점을 놓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서양의 부상은 한마디로 최근 500년 내에 벌어진 가장 걸출한 역사적 현상이었다. 이것은 근대 역사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이야기이자 어쩌면 역사학자들이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수수께끼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풀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과거 서양이 패권을 잡은 진정한 원인을 알아내야만 오늘날 서양의 쇠퇴와 몰락 시점이 얼마나 임박했는지 조금이라도 정확히 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7. 백작이 1793년 중국의 궁정을 방문했다가 실망스러운 결과를 안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분명 그렇게 보였다 (아래 참조). 20세기에 힘을 얻었던 또 다른 주장은 유교 철학이 혁신을 저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부진에 대한 동시대의 분석은 잘 못되었다. 서양은 가지고 있었지만 동양에는 부족했던 여섯 가지 비장의 무기 중 첫 번째는 상업도, 기후도, 기술력도, 철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스미스가 언급한 대로 제도였다.
8. 그 때문에 일본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던 국제 무역과 이민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고스란히 놓치고, 말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18세기 후반 영국 농부의 식단에서 축산 물이 차지한 비중은 28퍼센트를 넘긴 반면 일본 농부들은 곡물, 특히 쌀을 주식 (95퍼센트)으로 한 단조로운 식생활을 했다. 이러한 영양 상태 차이는 곧 1600년 이후 나타난 두 국가의 월등한 신장 차를 설명한다. 18세기 영국 죄수의 평균 신장은 170센티미터였다. 하지만 같은 기간 일본 군인의 평균 신장은 159센티미터에 불과했다. 이제 동양인과 서양인이 만나면 서로 눈을 맞출 수 없었다.

달리 말해 작은 섬나라 영국이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상업과 식민지 개척의 물질적 혜택을 받아 동양의 위대한 문명보다 앞서나가고 있었다
. 중국과 일본이 택한 길, 즉 해외 무역으로부 터 등을 돌리고 쌀 재배를 강화한 것은 곧 인구는 증가하지만 소득은 줄어들고 영양 상태와 신장,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흉작이 들거나 경작 활동에 문제가 생기면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 영국은 약물 사용 면에서도 운이 좋았다. 오랜 세월 술에 찌들어 있던 영국인들은 17세기 유입된 미국 담배, 아라비아 커피, 중국 차 덕분에 비로소 정신이 맑아졌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커피 하우스로 신경을 자극받았다. 3분의 1은 커피, 3분의 1은 주식 거래, 나머지 3 분의 1은 거기에서 즐기던 자유로운 잡담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반면 중국인들은 아편이 가져다주는 무력감에 젖어들고 말았다. 그들의 담뱃대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9. 하지만 바다 건너 영국 사람들, 즉 중국을 이상화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영국 정부를 비판하는 데 관심이 없고 오직 상업과 산업만 중 시하던 사람들은 중국이 정체되어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793년 제1대 매카트니 백작이 원정대를 이끌고 건륭제를 찾아갔다. 결국에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황제를 설득하여 문호를 재개방하는 것이 원정대의 목표였다. 매카트니 백작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는 노골적으로 거부했지만 상당한 양의 조공을 바치기는 했다. 
10. 역사를 보는 그의 시각은 옳았다 (그리고 스미스의 시각과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30년 전, 반세기 만에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했다면 당신은 아마 터무니없는 공상가 취급을 받았을 것 이다. 그리고 1420년 서구 유럽이 언젠가 아시아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할 것이며, 500년 내에 영국인이 중국인보다 아홉 배 더 부유할 것이라고 했다면 역시 비슷한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경쟁이 서구 유럽에 가져온 역동적인 효과였다. 그리고 정치적 독점이 동아시아에 야기한 저해 효과였다. 
11. 이들은 인쇄술 역시 배척했다. 오스만제국에서 필사본은 신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펜을 종교적으로 중요시했고 인쇄보다 서체 예술을 선호했다. ‘학자의 잉크가 순교자의 피 보다 더 신성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1515년 술탄 셀림 1세는 인쇄기를 사용하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슬람교와 과학적 진보를 조화시키지 못한 것은 재앙이었다. 유럽 학자들에게는 아이디어와 영감이 샘솟았지만 이슬람 과학자들은 최신 연구들에서 단절되었다. 만일 과학혁명이 어떤 네트워크에 따라 발생 한 것이라면, 오스만제국은 사실상 그 네트워크 바깥에 존재했다. 18세기 후반까지 중동어로 번역된 서양 책은 매독 치료에 관한 의학 책뿐이었다.
12. 이런 무기들은 과학적 지식을 군사력에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것이 서양과 나머지 세력의 격차를 짧은 시간 안에 크게 벌여 놓은 경쟁, 혁신, 진보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 주역들은 대부분 세 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3. 과거 유럽을 둘러본 오스만 사절들의 보고서는 비웃음 일색이었다. 그랬다. 이 만성적인 우월 콤플렉스가 바로 오스만제국의 개혁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해물이었다. 에펜디의 열성적인 설명은 극단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변화를 시사했다. 하지만 이스탄불의 모든 사람이 서양 문물에 수용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이 뛰어난 인물이 결코 수상 자리에 오를 수 없었던 것도 아마 오스만 국가 체계에 관한 그의 암묵적 혹은 명시적 비판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럽 각국 정부의 뛰어난 특색을 설명하는 것과 오스만의 국가 제제 개혁을 단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14. 또 다른 프랑스인 전문가 알베르 뒤바예 (Albert Dubayer) 장군의 지휘 아래 설립된 '새로운 군대 (New Order Army)'는 예니체리를 비롯한 반대파에게 1807년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제 오스만 군대는 주로 장교들의 재산을 불리고 그들의 편의를 봐주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전투 능력이 약화된 오스만 군대는 내부 반란에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15. 심지어 이 시계에는 아랍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당신의 1초, 1시간, 모든 시간, 수백 년을 가치 있게 하기를.” 이 시계는 모든 면에서 동양의 기술로 빚어낸 걸작 같아 보인다. 단 한 가지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말이다. 이 시계의 실제 제작자는 오스트리아의 빌헬름 키르슈(Wilhelm Kirsch)라는 사람이었다. 키르슈의 시계에서 완벽하게 알 수 있듯 서양 기술을 단순히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오스만제국을 현대화할 수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새로운 궁전만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헌법, 새로운 문자, 사실상 새로운 국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이 모든 것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한 사람의 노력 덕분이었다.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ürk).
16. 두 아메리카 혁명의 차이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는 없다. 제정 이후 한 번도 개정된 적 없는 미국 헌법은 수정할 수는 있지만 어길 수는 없다. 하지만 26번이나 개정된 베네수엘라 헌법은 일회성 성격이 강하다. 독립 이래 베네수엘라보다 헌법을 더 많이 개정한 나라는 도미니카공화국(32번)이 유일하다. 아이티와 에콰도르가 각각 24번과 20번으로 3위와 4위를 달리고 있다. ‘사람의 정부가 아닌, 합의 정부'를 뒷받침하기 위해 헌법을 마련한 미국과 달리 라틴아메리카에섯 헌법은 법치주의를 전복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17. 한마디로 우리의 옷차림은 중요하다. 서양의 가장 위대했던 두 차례의 경제 도약, 산업혁명과 소비 사회는 의류와 관계가 깊었다. 
18.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은 잘못된 질문일지도 모른다. 서양 문명의 모든 업적, 자본주의, 과학, 법률과 민주주의의 지배 같은 것들을 모두 소명이라는 열악한 행위로 평가절하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모든 성취를 소망이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서양에 대한 궁극의 위험은 급진적 이슬람주의나 다른 외부의 힘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유산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질 못하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19. 종교는 중요하다. 이미 앞에서 유교의 '안정화 윤리' 때문에 서유럽에서 혁신을 몰고 온 경쟁적인 제도상의 뼈대가 중국에서 발달 하지 못했다고 한 바 있다. 설사 중국이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이은 『유교와 도교』(1915)에서 묘사된 것처럼 정체되고 늘 똑같은 사회와 거리가 멀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앞에서 이슬람 지도자 이맘과 물라의 권력이 어떻게 이슬람 세계에서 과학 혁명의 불씨를 꺼뜨렸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남아메리카의 경제 발전을 저해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 것도 알아보았다. 하지만 서양 문명 역사에 종교가 가져다준 가장 큰 공헌은 아마도 신교가 서양 사람들을 일하고 저축하고 글을 읽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닐까? 산업혁명은 분명 기술적 혁신과 소비의 산물이었다. 또 노동의 강도, 시간의 증가와 함께 저축과 투자를 통한 자본 축적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적 자본의 축적에 의존했다. 신교가 장려했던 교육은 이 모두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다시 생각 해보니 신교의 직업윤리뿐 아니라 '언어'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문은 이것이다. 오늘날 서양 혹은 적어도 그중 상당 부분은 종교와 함께 윤리마저 잃어버렸는가?
20. 하지만 스미스는 아니더라도, 베버가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보았다면 미심쩍다고 생각했을 부분이 분명 있다. 가장 성공적인 종파들이 번창하는 이유는 정확히 월마트 숭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일종의 소비자 기독교를 발전시킨 덕분이다. 이런 예배 는 다녀오기 편할뿐더러 보기에도 즐겁다. 스타벅스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볼 수 있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다녀오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또 신도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적은 반면 신도들은 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그래서 제임스 리버에서 올리는 기도는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요청의 연속인 경우가 많다. 성부와 성자, 성령은 곧 분석가, 인생상담가, 퍼스널 트레이너로 대체되었다. 미국 백인 5분의 2 이상이 살면서 한 번 이상 종교를 바꾸는 지금의 환경에서 신앙도 그에 따라 변화무쌍해졌다. 

종교를 취미화할 때 유일한 문제점은 미국인들이 베버가 본 프로테스탄트 윤리 - 만족 지연의 필연적인 귀결이 곧 자본 축적- 로부터 이미 멀리 떠나왔다는 것이다. 
21. 우리는 무엇이 서양의 세계 패권을 설명하는지 연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 처음에는 서양이 우리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는 서양의 정치 체제가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서양의 경제 시스템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우리는 서양 문화의 중심에 종교,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서양이 그리도 강력한 이유다. 사회적·문화적 삶의 기독교적 윤리 기반이 자본주의의 출현과 그 후 민주 정치로 의 성공적 이행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2.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런 개념, 쇠퇴와 멸망은 피할 수 없고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필멸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점차 퇴보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본능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명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육신은 풀이다(인간의 삶은 덧없다는 뜻의 「이사야」, 40장 6절). 마찬가지로 모든 오만한 기념물은 우리 업적이 남긴 유물 사이로 쓸쓸한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가게 되어 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이 쇠퇴와 몰락 과정이 복잡한 사회와 정치 구조의 영역에서 어떻게 펼쳐질 것이냐다. 문명은 아마겟돈의 전장에서 쾅 하는 폭발과 함께 붕괴되는 것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신음하다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인가? 그 결정적인 질문에 답 하는 유일한 길은 역사적 설명의 첫 번째 원칙들로 되돌아가는 것뿐 이다.
23. 하지만 사실 이 개념적 틀 자체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탄생, 성장, 죽음이라는 문명의 거대한 순환 주기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콜의 작품도 어쩌면 역사의 과정을 오해한 것일 수 있다. 역사가 주기에 따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움직인다면, 그러니까 때로는 거의 정체되어 있다가 갑자기 급격히 가속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라는 시간이 계절의 변화처럼 느리고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꿈속처럼 멋대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면? 무엇보다도 붕괴가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밤중의 도둑처럼 급작스럽게 공격해온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24. 문명의 승리요건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다. 첫째, 가장 높은 점수로 현대의 끝까지 가는 것, 둘째, 알파센타우리계까지 진출하여 우주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것, 그런데 이것이 진정 역사적 흐름의 이치인가? 앞에서 살펴보았듯 왕국과 서유럽의 공화국 행태를 한 서양 문명이 대략 1,500년 이후 세계 다른 문명 대부분을 파괴하기나 정복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서양 강대국들이 서로 벌였던 전쟁의 수나 규모의 비교해보면 이 중 상당부분이 최소한의 분쟁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중국이 경제적으로 집계되고 지정학적 변방으로 물러난 것은 아편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극동지방의 경작 시스템과 황실 통치 체제에 내재되어 있던 내부적 경화 때문이었다.
25. 과학 혁명 가담을 막은 고질적 문제 때문이었다.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문명 사이에 대규모 충돌은 없었다. 전자가 후자보다 제도적으로 월등하여 그들의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럽제국들이 아프리카에서 벌인 전쟁은 그들이 유럽 땅에서 서로 간에 벌인 사건에 비하면 하찮을 정도로 소소 했다. 아프리카 정복은 맥심 대포보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전신국, 연구소의 성과 였다. 산업혁명과 소비 사회는 비서양 국가들에 강제할 필요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현실을 인식하고 있던 국가는 일본처럼 자발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칼이 아니라 펜, 무엇보다 공중 보건과 교육 개선을 통해 동양에 퍼진 직업윤리가 20세기 중반 부터 큰 성공을 거두었다.
26. 이번에야말로 동양의 도전자는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우리가 최고다” 라고 주장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끌려가는 입장에서 벗어난 지도 이미 오래다. 게다가 헌팅턴이 생각한 문명의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제 지난 500년간 서양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변화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다. 한 문명이 약해지고 다른 하나가 강력해진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문명이 충돌할 것이냐가 아니라 약해진 문명이 곧장 붕괴로 넘어갈 것이냐다.

 

시빌라이제이션
국내도서
저자 :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 구세희, 김정희역
출판 : 21세기북스(북이십일) 201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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