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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사회주의의 이해

by 마리우온 2017.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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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마르크스-레닌의 역사발전 5단계설에 대해 먼저 논하고자 한다. 중국의 정식명칭은 중화인민민주공화국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인 명백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우선, 마르크스의 공산사회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각기 다르게 해석한 사회주의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그림 1 공산주의 역사발전 5단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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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자체제작


마르크스의 공산사회

  마르크스는 사회의 양상을 역사발전의 5단계로 설명하였다. 고대노예제부터 존재했던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착취관계는 역사의 발전단계를 거쳐 자본주의에 이른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자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불평등이 심화되고 결국 모든 것들을 빼앗긴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넘쳐나는 물건을 소비하지 못 해 공황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자본주의의 이윤추구가 가지는 필연적 모순으로 노동자 계층들은 단합하여 프롤레타리아 연합을 구성하고 자본주의의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를 이룩한다. 이 사회주의는 사람들간의 평등이 실현되고, 개인의 이윤추구가 사회의 부로 전환된다. 이 후, 지속되는 과학기술과 문명의 진보는 생산성의 극대화를 이루어내고,  결국 ‘능력에따라 일하고 필요에따라 분배받는’ 이상적인 사회인 공산(共産)사회 즉, 자본주의에서 모든 착취의 근원이 되었던 생산수단이 공유화되면서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사회가 이룩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 대도약

  마오쩌둥도 5단계설로 사회를 바라보았다는 점에선 마르크스와 동일하다. 단, 마오쩌둥이 바라본 중국사회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었다. 제대로 된 산업화는 커녕 경공업과 농업조차 제대로 발전되지 않은 중국사회는 이념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더라도 발전의 단계로 보면, 중세 봉건시대와 다를바가 없었다. 그 자신도 그것을 모르진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자체가 자본주의의 모순이후, 도래하는 사회라고 믿었으므로 자본주의의 단계를 뛰어넘어서 사회주의를 이룩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그러한 믿음속에서 농업의 집체화를 통한 생산성의 극대화와 중공업 육성을 위해 1차 경제개발과 대약진운동을 추진하였다. 인민들의 단합을 통해서 과학적 지식의 도움없이 자본주의가 지니는 생산성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다고 그 자신은 믿은 것이다. 비록, 생산기술의 가장 큰 토대인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부족 그리고 지식인에 대한 뿌리깊은 불관용과 기술인에 대한 천대로 처참한 실패를 기록했지만, 그의 사상적 단계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위였다. 어떻게 이룬 사회주의인데, 발전을 위해서 다시 자본주의로 가자는 것은 국민당에게 정부를 넘겨 준 것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

  대약진의 실패로 덩샤오핑 개혁정부가 들어섰다. 개혁이 차금차금 이루어졌고, 자본주의에서 받아들이는 사유재산인정등의 제도들이 야금야금 탄생했다. 그는 이것에 반발해 홍위병들을 동원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는데 이는 그의 입장에서 동지들의 땀과 피를 바쳐 이룩한 사회에서 다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자는 모습으로 비추어 졌다. 역사의 발전단계로 보면, 다시 과거의 가자는 반동(反動)행위로 비추어졌다. 그 자신의 개인적 안위와 정치적 욕심을 위해서라 볼 수도 있지만,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그의 혁명동지들을 보며 그는 잘 못된 길을 바로잡고자 했다. 아무튼, 결과론적으론 대도약도 문화대혁명도 중국에게 상처로 남았을 뿐이다.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 공산당의 주도아래, 자본주의를 뚫고나간다.

  덩샤오핑 또한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이후 도래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중세

봉건주의 사회 수준인 중국의 현실을 이해했다. 단,  그는 좀 더 창의적으로 사회주의의 도래를 바라보았는데, 이는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말로 요약된다. 본래 마르크스적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의 노동자 착취를 통해서 무너지고 마는 필연적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로 도래한다. 마오쩌둥은 인민들의 단합과 노력으로 이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고 보았으나, 덩샤오핑은 달랐다. 그는 자본가들이 축출된 현대중국을 계급투쟁이 끝난 사회주의 사회로 바라봤다. 단, 아직,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초급 단계의 사회주의로 이해했다. 그는 초급단계의 사회주의가 완성된 사회주의로 가기위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자본 축적의 필요성을 그리고 때때로 100만 인민의 노동보다 진보적 과학기술이 지닌 힘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중국식 사회주의는 다음의 단계를 지난다. 초기적 형태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인다. 단, 이는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부분적 수용이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다. 부분적 개방과 외국인 투자유치, 연안지방 육성을 통해 기술의 진보와 자본의 축적을 이룬다. 사유재산을 인정해 역량이 있는 개인이 자신의 역량만큼 실현하고 분배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단, 불평등의 기원이 되는 자본의 축적은 제한한다. 주 생산요소인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며, 부분적 자본주의의 수용과 통과를 위해서 공산당이 주도하고 사회를 조정한다. 중국식 사회주의에서 주장하는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부자가 된다. 단, 결국 모든 부는  인민의 부다.’라는 그의 말은 아무리 자본주의의 형태를 띄더라도 중국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걷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사회주의로 가기위해 공산당의 주도아래 자본주의를 뚫고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노선을 완벽하게 지지했음을 나타낸 사건이 있다. 바로 89년 6.4 천안문 사태(이하 천안문 사태)이다. 경제 발전과 개방으로 자라난 사상의 토대는 중국에 새로운 사상의 유입을 요구했다. 몇몇 서구 친화적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은 미국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정의의 여신상을 천안문 앞에 건설하면서 그에게 대항하고 시위하였다. 그는 공산당이 주도하면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사회를 꿈꾼 것이지 완전 서구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었다. 덩샤오핑에게 그것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이었고, 결과는 유혈사태를 낳았다.그에게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이라는 경제발전의 이념 토대를 제공한 자오쯔양마저 천안문사태에 대학생들을 옹호하였다가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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